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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삼국지도 10폭 병풍(三國志圖 十幅 屛風), 조선, 전체길이 143.0cm, 전체너비 445.0cm, 세로 115.3cm, 가로 40.0cm

삼국지연의도(三國志演義圖)는 일찍이 조선에 유입되어 인기를 얻었는데, 삼국지연의가 가지는 역사인식이 조선의 성리학적 이념과 맞았기 때문이다. 특히 민간신앙으로 관우신앙이 성행하여 전국 곳곳에 관왕묘가 설치될 정도로 삼국지연의가 조선에 미치는 영향은 컸다. 

18세기 이후 인쇄술의 발달로 삼국지연의의 상업적 유통이 매우 활발해졌고, 한글로도 번역되어 부녀자들과 어린이들까지 독자의 폭이 넓어지며 축약본이나 편집본이 등장할 정도로 유행하였다. 출간된 책에는 소설 내용의 이해를 돕는 삽화들이 수록되었고, 이를 토대로 19세기 이후 그림으로 제작된 ‘삼국지연의도’라는 화제가 더불어 성행하였다. 

당시 한양을 노래한 「한양가漢陽歌」나 유득공柳得恭[1748-1807]의 『경도잡지京都雜誌』 등에 <삼고초려도三顧草廬圖>가 등장하여 당시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삼국지연의도」는 여러 폭으로 그려지거나 삼고초려도 한 장면으로 대표되기도 한다. 이 「삼국지연의도」는 총 10폭의 병풍으로 구성되어 유비, 제갈량, 관우, 장비 등 4사람의 이야기 위주로 구성되었고, 특히 유비가 강조된 것이 특징이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도원에서 의형제를 맺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사마휘가 명사를 다시 천거하는 장면, 봉의정에서 여포가 초선을 희롱하는 장면, 조조가 술을 데우며 영웅을 논하는 장면, 관우가 다섯 관문을 지나며 장수들을 베는 장면, 그리고 유비가 한중왕 자리에 오르는 장면 등은 다른 삼국지연의도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두 번째, 세 번째 장면은 삼고초려 장면에 할애하였고 적벽대전과 같은 주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양한 고사들 중에 화가가 장면을 취사선택하여 그림을 그렸으며, 이는 제작을 의뢰한 주문자의 취향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