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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보물 제 383호 창덕궁 돈화문

15세기 초에 정궁인 경복궁 동쪽에 이궁으로 조성된 창덕궁은 언덕 지형에 자리하고 있어 평탄한 곳이 많지 않다. 풍수지리 사상에 따라 이러한 불규칙한 지형지세를 이용해 궁궐 건물을 경내 남쪽에 배치하고, 북쪽 넓은 구릉에는 비원이라고도 불리는 후원을 조성하였다. 

이렇듯 자연 지형을 이용해 건물을 세운 까닭에 창덕궁은 궁궐 건축의 전형적인 격식에서 벗어나 주변 환경과 뛰어난 조화를 이루는 특색을 지녔다. 이로 인해 정문인 돈화문에 서면 경복궁이나 창경궁, 경희궁과는 달리 정전이 보이지 않는 차이점도 가지고 있다.

조선 태종(太宗) 12년인 1412년 5월에 건립하였으며, 창덕궁의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재위 40년인 1607년에 복원이 시작되어 광해군 원년인 1609년에 완공되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는 현존하는 궁궐의 대문 중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이다.

돈화문의 구조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重層)건물에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으며 정면 5칸 중 좌우로 한 칸씩을 벽으로 막은 3문형식이다. 평상시 궁궐의 정문은 임금이나 외국 사신들이 이용하는 것으로 돈화문 역시 임금의 전용문인 가운데 어칸을 좌우보다 조금 넓게 하여 위계를 두었다.

신료들이 일상적으로 드나들던 문은 동쪽의 단봉문(丹鳳門)이었다고 한다. 좌우 협칸의 안쪽에는 위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어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위층 내부는 좌우로 있는 2개의 고주(高柱)를 제외하고는 안쪽 기둥 없이 넓게 트여 있으며, 마루를 깔고 4면에 작은 판문을 돌려 달았다. 건립 당시에는 이곳에 큰 종과 북을 걸어놓고 시각을 알려주거나 비상시에 위급을 전했다고 한다.

공포는 상하층이 모두 내삼출목, 외이출목의 다포계통으로 아직도 건실한 기풍을 지니고 있다.

고종 27년(1890)경 자동차가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기둥 밑둥에 가로질렀던 문지방을 끼웠다 뺐다 할 수 있게 개조했다고 한다. 돈화문에는 원래 현판이 없다가 성종(1457-1494) 때 서거정에게 분부하여 이름을 지어서 걸게 하였다고 한다. 

‘돈화(敦化)’라는 말은 중용에서 인용한 것으로 ‘공자의 덕을 크게는 임금의 덕에 비유할 수 있다’는 뜻으로 여기에서는 ‘임금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돈독하게 교화한다’는 뜻으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