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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이츠쿠시마 병풍(嚴島和歌浦圖屛風), 일본-에도, 세로 164.5cm, 가로 355.2cm 관련정보 MEDIA N | 국립중앙박물관 더보기
겐지모노가타리병풍(源氏物語屛風), 일본-에도, 세로 151.0cm, 가로 350.0cm, 전체높이 168.0cm, 전체너비 365.2cm, 두께 11.0cm 일본 헤이안시대의 대표적인 문학작품인 ″겐지이야기(源氏物語)″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원래는 병풍 한 쌍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한 쪽 만이 전해진다. 양식적인 측면에서는 도사 미츠오키(土佐光起, 1539-1613) 전통을 따르고 있으며, 에도시대의 17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화면의 오른쪽에는 겐지모노가타리의 제 7장의 에피소드가, 오른쪽에는 제51장의 에피소드가 묘사되어 있다. 화면 중간의 여성들이 헤이안시대가 아닌 에도시대 복장을 한 것은 제작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반영하고 있다. 관련정보 MEDIA N | 국립중앙박물관 더보기
왕세자탄강진하도 병풍(王世子誕降陳賀圖屛風), 조선, 가로 43.5cm, 세로 269.0cm 1874년(고종 11) 2월 고종(高宗)의 둘째 아들인 순종(純宗)의 탄생을 축하하며 관원들이 진하(陳賀)했던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제2폭에서 제8폭에 걸쳐 그려진 그림은 전체적으로 평행사선구도가 이용되었으며 진하례(陳賀禮) 광경은 부감법(俯瞰法)을 써서 표현하였다. 진하례가 열리고 있는 창덕궁 인정전을 중심에 배치하고 양쪽 옆으로 주변의 다른 건물들과 나무, 산봉우리 등을 그렸다. 인정전 건물의 기둥과 벽면을 높게 표현하여 실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인정전 안에 오봉병(五峰屛)을 펼친 임금의 자리를 중심으로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관리들, 의식의 진행을 맡은 이들과 음악을 담당한 악대, 고종 임금의 가마, 종친과 무관들, 의장대 등 당시 행사에 동원된 모든 인원과 여러 기물들.. 더보기
행실도십곡병풍(行實圖十曲屛風, 五倫行實圖, 孝子圖, 兄弟圖, 漢나라 薛包의 고사, 한글), 조선, 세로 87.6cm, 가로 39cm 관련정보 MEDIA N | 국립중앙박물관 더보기
보물 제1769호 창덕궁 주합루(사정기비각, 영화당, 천석정, 희우정, 서향각) 영화당은 왕과 신하들이 연회를 베풀거나 활을 쏘기도 한 정원이었는데, 정조 때부터 과거 시험장으로 이용하였다. 왕이 참석한 가운데 시관이 자리하여 시제를 내리고, 초시에 합격한 응시자들이 마지막 시험을 치른 곳이다. 사정기비각, 사정기비각은 창덕궁 후원의 연못 부용지(芙蓉池) 서쪽 물가에 있는 비각이다. 비각으로 보호되어 있는 비(碑)에는 부용지를 만들게 된 배경과 과정이 새겨져있다. 현재 위치는 옛날 술성각이 있던 자리로, 숙종 16년(1690)에 세워졌다. 서향각, 서향각은 주합루 아래층인 규장각의 부속건물로 어진과 어제, 어필을 옮겨와 서책을 볕에 쬐고 바람에 쐬는 일을 하던 곳이었다. 희우정, 희우정은 서향각 북쪽의 작은 정자이다. 건립할 당시에는 취향정(醉香亭)이라고 하는 초당이었으나 1690(.. 더보기
보물 제 1763호 창덕궁 부용정 창덕궁 후원에는 3면이 경사지이며 경사가 모이는 한가운데에 방형(方形)의 연못인 부용지가 있다. '부용(芙?)'은 '연꽃'을 뜻하는데, 창덕궁 후원의 대표적인 방지(方池)이다. 동서 길이가 34.5m, 남북 길이가 29.4m에 이르는 방형의 연못이다. 창덕궁 후원에는 부용지와 부용정, 영화당, 주합루가 있는데 이 중에서 북쪽에 주합루가 위치하고 있다. 주합루 주변은 3단의 화계(花階)에 정원을 꾸며 놓았으며, 화계 첫 단에는 어수문(魚水門)을 두고 주합루에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주합루의 정문인 어수문은 임금을 물에, 신하들은 물고기에 비유하여 군신의 융화적 관계를 함축한 뜻이 담겨져 있다. 어수문은 임금이, 그 옆 작은 문(협문)은 신하들이 출입하였다. 창덕궁 주합루(昌德宮宙合褸)는 정조 즉위년(17.. 더보기
보물 제 1762호 창덕궁 금천교 금천교는 창덕궁의 돈화문과 진선문 사이를 지나가는 명당수위에 설치되어 있다. 창덕궁의 명당수, 즉 금천(禁川)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돈화문 오른쪽까지 와서 궐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이 어구(御溝) 물가에는 화강석 6~7단을 가지런하게 쌓은 축대를 설치하였고, 여기에 금천교를 설치하여 궐내로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금천교는 창덕궁이 창건되고 6년 뒤인 태종 11년(1411) 3월 진선문 밖 어구에 설치되었는데, 그 후 숱한 화재와 전란에도 불구하고 창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물가의 축대는 부벽(扶壁) 구실을 하고, 홍예 위에는 장대석 모양의 멍엣돌을 얹었다. 다리의 상면은 불룩하게 곡면으로 만들고 바닥을 3칸으로 구분하여 칸마다 장대석을 고르게 깔았으며, 다리 가장자리에는 돌난간을 세워 .. 더보기
국보 제225호 창덕궁 인정전 관련정보 MEDIA N | 문화재청 더보기